VLCCⓒ현대중공업
정주영은
비행기에 오른 이 후 눈을 감은 채 아무 말이 없다.
자고 있는건지 숨소리조차 매우 평온하다. 그를 태운 비행기가 김포공항을 이륙한지도 꽤
시간이 흘러 지금은 위치를 알 수 없는 어느 땅위를 날고 있지만 비행중인지 아니면 체공중인지 모를만큼 기체는 조용하다. 그러나 그는 몇 시간째
거칠고 흉포한 바다위에서 흔들리는 상상을 하고 있다.
- 그는 나를 알지 못한다....
- 그는 한국이란 나라도 잘 알지
못한다....
가슴을 짓누르는 불안과 초조감으로 갑자기 심한 배멀미와 함께 위가 내용물을 역류하려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
그러나 그의 숨소리는 여전히 고르고 평온하다.
그는 거인이지 않은가. 거인은 남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항문으로 호흡하는 법!
슬쩍 일어나 화장실로 간다.
걷는 폼으로 봐서 제법 오래 참았던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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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노스.
그는 그리스뿐만 아니라 세계유수의 내노라하는 선박회사
회장이다.
오나시스 못지않은 대선단을 이끌고 있는 해운업계 최고의 거목이고 그리스 정계에서조차 두려워하는 거부이다.
한국에서 왔다는
볼품없는 영세 기업인의 면담 요청을 받고, 마침 20분가량 시간짬이 있어 심드렁하고 거만하게 그의 앞에 앉았다.
미스터 정이라...
"멋땜새 날 보자캤누?"
"나에게 배를 주문해라. 기왕이믄 큰 넘으로.."
한국에 조선소가 있다는 걸 들은 적 없고 관심조차없던 리바노스는 코로만 세 번 웃었다.
"우리는 거룻배나 고기잡이배는
흥미없는데?"
"주문만 해라. 기왕이믄 큰 넘으로.."
"우리는 일본에서만 배를 짓는다. 한국에 그만한 조선소는 있남?"
"그딴 걱정말고 주문이나 해라. 기왕이믄 큰 넘으로.."
"우리는 일본의 조선 기술만 믿는다. 한국에 그만한 기술력이 있남?"
"기왕이믄 큰 넘으로..."
리바노스가 다시 코로만 두어 차례 더 웃었다.
정주영이 가지고 간 검은 색 007백을 테이블에 얹고 탈깍! 두껑을 열어 노란 서류봉투
하나를 꺼내 앞에 놓았다.
"그게 멋꼬?"
그것은 미포만을 찍은 흑백사진 여러장.. 그리고 500원권 동전 한 닢이었다.
"여기다 조선소를 지을거다. 땅의 뽀대가 죽이지 않는가.. 그리고 이 동전의 뒷면을 잘 봐라. 그림이 보이느냐. 이것이
거북선이라 불리는 철갑선인데, 우리는 세계 최초로 전투용 철갑선을 만든 조상을 가진 민족이다. 이만하면 조선소와 기술력은 믿을만
하지않은가?"
리바노스는 코로 한 번 웃었다. 그것도 약간 조심스럽게..
"그럼 조선소는 언제 완공될낀데?"
"일단 주문해라. 기왕이믄 큰 넘으로.. 그리고 돈을 선불로 달라. 그 돈받아서 조선소를
지을게다."
잡아 먹을 듯이 정주영을 노려보고있던 리바노스는 입꼬리를 슬쩍 비틀어 웃는 듯 하더니
갑자기 벼락처럼 고함을 질렀다.
"鳥타! 계약하자!"
그는 즉석에서
주문했다.
그것도 VLCC, 일본에서조차 만들기를 두려워하는 세계 최대 크기의 30만톤급 초대형원유운반선(Very Large Clude
oil Carrier).
어느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거대한 배를 덜컥 주문한 것이다. 선금지불 조건으로...
현대중공업의 제 1호선은 그렇게 계약되었다.
문을
나서면서 정주영은 코로 일곱 번은 족히 웃었다.
그러면서 화장실로 급히 달려갔다. 항문쪽은 지금 장난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