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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ckabout (4)風...鱗. 紋 2006. 2. 4. 17:34
8.
또 하나 건너야 할 강은 우리집에서의 반대였는데, 당신들 자식을 어물전의 쉬파리 보듯 질겁하는 그녀의 부모님에 대한 불쾌감도 있었겠지만, 배알도 없이 오만 구박을 감내하면서 기어코 그녀를 집으로 끌고 들어오려는 아들에 대한 서운함도 쉽게 감추려 들지 않으셨다.
<니가 뭣이 부족해서 그런 수모를 받노?>라던지, <그 집 딸, 억만금을 지고 와도 우리집에 안들여 놓을게다.>라며 틈날 때마다 나의 다짐을 받으시려는 엄니때문에 아직 부모님께 인사도 못시킨 상태였다.
그러나 기왕 그녀의 부모로부터 결재가 떨어진 이상 더 미루거나 머뭇거리고 싶지 않아, 적당한 때에 아주 못을 박아야겠다고 궁리를 하곤, 할머니 제사차 친척들이 다 모이는 음력 8월 모 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그리고 그 날이 왔다.
"할머님, 드릴 말씀이 있슴다"
제례가 거의 끝나갈 무렵, 향과 초를 끄기 전 아버지와 숙부들께서는 잠시 한 켠에 서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계실 때 혼자 젯상앞에 다가가 술을 다시 갈아 부어 올리고는 젯상앞에 꿇어앉아 못을 꺼냈다.
긴장했던 탓으로 목소리가 약간 컸는지 주변이 일순 조용해졌다.
"제가 올해 스물 여덟 아입니까. 내년이믄 스물 아홉이고요."
뜬금없는 나의 행동에 허둥지둥 다시 옷매무새를 갖추고 도열하고 선 사람들의 목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왔다. 표푸이가 벌써 그리 됐냐는 둥, 얼라들 크는 걸 보니 자기가 늙어가는 걸 알겠다는 둥 몇 마디의 참견이 있었으나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내년이믄 스물아홉이라 아홉수라 캐갖꼬, 결혼가튼 거 피하는 나이라 캅니다."
고모들 숙모들과 따로 어울려 조곰조곤 말씀 나누고 계시던 엄니께서 슬쩍 이쪽으로 건너와 앉는 것이 보였다. 엄니의 초치기가 시작되믄 매우 피곤해지니 후딱 못을 박아버려야 했다.
"할무이, 저 올해 결혼할랍니다."
쿵! 못 하나.
"예식장은 12월로 예약을 해 놨심다."
쿵! 못 두울.
"신부감은 밀양 박씨이고 올해 스물 아홉입니다."
쿵! 못 셋.
"결혼 비용은 일체 집에 요구 안하고 제가 알아서 할낍니다."
쿵! 못 넷.
"손주가 내년 2월에 태어 날낍니다."
쿵! 못 다섯.
<어라, 표푸이가 애인이 있었는가배?> <너그끼리 다 정리해 뿌릿나?> <각시가 나이가 너무 많은 거 아이가?> <돈 마이 벌어 놨는갑다.> <요새 얼라들 못말리것네..> 기타, 수십 개의 코멘트가 쏱아졌지만 가장 큰 소리는 엄니의 <야 이노무 자스가, 니가 미친 넘 아니고서야 만다꼬 그집에 장개갈라 카노.. 죽어도 안된다. 그럴라 카모 이 집에서 아예 나가삐라!>류의 못 뽑으려는 소리였다.
독일어로 『Errae humanum est』 -실수는 인간적이다- 라는 문장이 있다... 이 세 단어의 앞 글자만 따면「Ehe」, 즉 "결혼"이란 말인데, 그래서 결혼은 사람이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가장 인간적인 실수이다... 라는 일견 그럴 듯한 말장난 같은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지금 내가 생각해도 참으로 그럴 듯한 말이 아닌가 한다.
처절한 결사항전을 해서라도 결혼이란 걸 성공하는 것만이 그녀를 끝까지 채금지는 것이라 믿었던 그 진지하고도 거룩한 투지가 사실 얼마나 멍청하거나 임상의학적으로 위험한 심리상태인가 하는 걸 지금에 와서야 깨닫고 있으니. 아무튼...
생전에 친지뿐만 아니라 가족들이 가장 어려워했고 그래서 집안의 어른 역할을 하셨던 할머니앞에서 무대공연 하드키 간접대화로 선언함으로서, 그 <인간적 실수>에 대한 가족 패널들과 토론의 여지를 공학적으로 얼버무려 버렸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선고하는 말투가 무척 낭랑하기 짝이 없었으니 꽤나 당돌하고 일견 폭력에 가까운 불손함으로 보이기도 했을게다.
아버지는 당혹한 빛이 역력했지만 아무 말씀없이 날 잡아 먹을 듯한 눈으로 노려보고 계셨는데, 설마 자식을 잡아 먹기야 하랴.. 싶어서 나도 아버지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늘 절대 합리적이던 아버지의 성품이신지라, 그 동안 자라면서 단 한 차례도 아버지에게 맞아 본 적이 없었으니 꿀밤 한 대 맞을 것조차 염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갑자기 눈에 불이 번쩍 일었고 볼이 얼얼해졌다.
정확하게 귀싸대기를 올려붙이신 것이다.
"아랐다. 니 하고자븐 대로 해라. 병신가튼 노무 자슥!"
자식이 좀 더 콧대높고 당당하게 살기를 바래서 그러셨을까. 아니믄 사돈 될 그녀의 부모에 대한 서운함이 하도 커서 그러셨을까. 아버지는 무척 속상하신 듯 했고, 세상에 태어난 지 처음으로 가정폭력이란 것을 행사했다.
당신의 완강한 반대의 뜻을 거스르고 결국 여자를 집으로 데리고 들어 와 한동안 동거생활을 하면서 나중에 첫 손주까지 낳은 후 결혼식을 올렸던, 그 큰 아들의 대책없는 반항에도 아버지는 말로만 야단칠 뿐 손바닥은 아끼셨거늘..
어찌 생각하믄 "이느무 자슥들.. 안패고 말로 하니깐 점점 행태가 이상해지는 거 가터.."하는 생각으로 우리 형제의 새로운 획득형질을 의심하신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만..
어쨋거나 그 날은 우리 엄니가 흰 띠를 서너 개 맨 채 들어 누우실 차례였다.
그 날의 제사는 유별나게 고요하고 거룩하게 치뤄졌고, 제례가 끝난 후 모든 친척들은 서둘러 돌아 갔다. 아버지가 다 쫓아버리셨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제례의 뒷정리를 마친 후 형이 날 불렀다.
"니.. 내년 2월에 얼라 태어난다 카는 기 진짜가?""뻥이우. 예식장 예약도 아직 안했지비. 흐흐흐...""나쁜 새끼.. 흐흐흐흐... 가서 한 잔 하자."
암튼, 며칠 후 그녀는 부모님께 인사도 드렸고, 우리집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9.
결혼식을 준비하려니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우선 비용이 제일 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500만원짜리 재형저축 탄 걸로는 결혼식 비용만 생각해도 턱없는 금액이라 궁여지책으로 아버지의 절친한 친구분을 찾아갔다.
"돈 좀 빌려 주이소.""을매나?""전셋방 구할 돈만 만들어 주이소."
그래서 당시로서는 거금인 800만원을 빌려 구서동 단독주택의 방 두 개짜리 이층을 구했다.
집에 들어갈 세간은 소꼽장난을 하기에도 넉넉하지 않을 정도인 그녀 자취방 세간들을 옮겼다. 어쨋거나 12월14일 오후 한 시로 예식장도 계약하고, 둘이서 갖고 있던 부스러기 현금을 쪼개고 나누어 빠듯하게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던 어느 날,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연락이 왔다.
음력 몇 월 며칠 새벽 5시. 그 시각에 맞춰 함을 들이라는 통보였다. 함이라면... 오징어 탈을 쓰고 초롱을 앞세워 함 사시오, 함 사려 외치는 그것 말이구마. 그 짓도 해야 하는가. 아, 이 관습의 끈질긴 힘이여. 한 푼이 아쉬운 이 마당에 그런 것도 해야 하구나..
큰 여행용 가방을 하나 샀고, 그 속에 신부에게 보내는 약간의 예물과 옷가지, 그리고 사주단자를 싸서 넣었다. 예물이래야 금반지 목걸이 귀걸이 팔찌 그리고 조그만 다이아가 박힌 반지였고, 옷은 한복과 양장 두어벌, 코트, 기타 몇 가지를 더 넣었을 것이다.
새벽길은 어둡고 춥고 배도 고팠다. 그 해는 유난히 추위도 일찍 찾아 와 결혼식을 일주일 앞 둔 12월 첫 주인데도 한 겨울같은 바람이 살갗을 찢어댔다. 어릴 적부터 지긋지긋하게 붙어 다니던 친구 톳나무리가 기꺼이 함을 메고, 또 다른 친구 두 명이 더 동행했다. <얼마를 뜯을까..> <한 오십만 뜯자.> <구찮게 밀고 땡길 것 없이 삼심에 바로 하비쇼당하고 함을 넘겨주지 뭐>
사뭇 즐거운 셈까지 해가며 그녀의 집앞에 택시를 세웠을 때의 시각은 새벽 네 시 이십 분쯤 되었다.
"이 집 맞냐?""맞따.""근데 와 이리 조용하노.. 문도 안 열려있고?""글키.. 우리가 너무 일찍 온 거 아인가?"
대문은 굳게 닫힌 채 아무도 나와 있질 않았고, 닫힌 대문 틈새로 들여다 본 집 안의 켜진 불만이 최소한 그들이 잠들어 있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함 사시오오~" "함 사이소오~" "이 동네 시집갈 처녀가 누구요오~"
평소 수줍음 많고 내성적이기 짝이 없는 톳나무리가 겨우 목청을 돋구워 고함을 서너번 질렀으나 여기저기서 개들만 깨어 짖어댈 뿐, 그 집에선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이게 먼 일이람? 뭐가 잘못된 거 아니여?
그 후로도 서너 번 교대로 친구들이 외쳤지만, 원 이거야.. 덩달아 백 코러스 넣느라 짖어대는 동네 개들 목만 쉬게 만드는 일이었다.
고함을 지르고 다시 질렀건만 창문 열어 보는 집 하나도 없고, 대문을 두들겨도 그녀의 집은 침묵에 쌓여 있을 뿐이었다. 오가는 사람도 전혀 없이 시퍼렇게 날이 선 칼바람만 사정없이 불어대는 새벽 주택가 골목에서 네 명의 총각들이 차츰 추위로 바싹 오그라 들어 새파랗게 질린 채, 개처럼 달달 떨어대다가 급기야 정신까지 혼미해지기 시작할 무렵, 대문이 조용히 열리며 그녀의 아버지가 나타나셨다.
"들어들 오시오."
지옥에서 옛 애인을 만난들 이리 반가울까. 날랜 범처럼 뛰어 들어갈 뻔 했는데, 친구 녀석 가운데 성정이 독한 어느 녀석이 실낱같이 남아있는 의식을 가다듬으며 흥정을 시작했다.
"봉투라도 하나 밟아야 움직일거 가튼디요.."
그러자 아무 말씀도 없이 우리를 보고있던 그녀의 아버지는 등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이건 무슨 경우라지? 도대체 이해가 잘 안되는 상황이라 친구넘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깊은 혼란에 빠졌다. 거의 바닥을 보이고 있던 의식마저 소진되고 이젠 기절할 것 같이 추운데 말이지...
다시 한 오 분 후쯤 그러고 있을 때 그녀의 어머니가 나오셨다. 예의 그 교양 넘치고 우아한, 그러나 <도대체 네깟 것들이..>하는 도도한 투로 귀찮은 듯이 말했다.
"들어들 와요. 추운데 동네 소란스럽게 그러지들 마시고..""아니 그래도.. 이건 쪼매..."
가볍게 한숨을 내 쉰 후 그녀의 어머니가 흰 봉투 하나를 건냈다. 삐끔 열어 본 친구넘의 얼굴이 빳빳해졌다. 물어보나 마나 억장이 무너지는 액수인가부다..
"정말 안들어들 오실 거예요?"
냉랭하고 차갑게 한 마디를 건네고는 돌아서 들어가 버리셨다.
이건 말도 안된다, 그냥 돌아 가 버리자, 이런 법은 없다, 동네방네 시끄럽게 떠들어대자, 파출소 신고해 버리자.. 얼어서 딱딱하게 굳어오는 머리를 흔들어가며 의견을 모으고 있는데 문이 다시 열리더니, 그녀... 아아 내가 그토록 채금을 지려 애쓰는 그녀가 쓰윽 나타났다.
너무나도 반가운 마음에 설움이 복받쳐 올라 꽉 잠긴 목으로 한 마디 하려는데, 그녀는 나를 슬쩍 지나치더니 톳나무리의 곁에 다가가 등에 칼을 꽃았다.
"야 톳나물, 너 독립운동 하니? 왜 안들어 와? " "아 아니, 그게 아이고요...
"
이럴 수가! 암만 학교에서 한 해 선배대접 해주느라 예우를 해 왔다지만... 함을 맨 톳나무리는 고만 무릎이 툭 꺾여 휘청거리면서 조류독감으로 목이 부러진 오리처럼 비실비실 집안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는게 아닌가.
비거판 넘, 나야칸 넘! 그런 말을 쏘아대야 했지만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는 엉뚱하게도 "그래, 그래.. 추운데 어서 들어가자.. 어어, 춥네 먼 날씨가 이리도 추블꼬..." 하는 커밍 아웃이었다.
입가에 허옇게 마른 침을 뭍힌 채 버티고 있던 친구넘들도 단숨에 무너지 듯 현관안으로 다투어 들어갔다.
시계는 그래도 다섯 시에서 오분이나 부족했다. 젠장.. 우리가 너무 일찍 도착했던 거여..
그러나, 그 함 때문에 또 하나의 난리가 앞에서 지둘리고 있었다.
(계속)
여기서 가리늦까 tip 하나...
슬쩍 코멘트를 추가합니다.
요 위에 있는 『Errae humanum est』는 독일어가 아니라 라틴어라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뻥쳐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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