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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3. (제목을 새로 붙이지 않을 수 없다)風...鱗. 紋 2005. 5. 19.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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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약간 늦게 눈을 떠 거실로 나오니, S형은 아니다 다를까 전혀 기억나는 것이 없다는 표정으로 5월의 종달새처럼 밝게 지저귀고 있었다. 그래도 속은 쓰린지 아침 식사를 먹는 둥 마는 둥, 국물 그릇만 깨작거리길래 어른스런 음성으로 쿠사리 하나 숟가락에 얹어 줬다.
- 선배도 이젠 주류에서 한 걸음 물러 서슈. 그리 약해빠진 지구력으로 주류의 주변을 맴돈다는 것은 상식없는 일이오.
그는 약간의 식은 땀을 흘리면서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말도 않았다.
Stig로 부터 전화가 왔다.
거제도에 있다하니 담박에 좀 보잰다. 나랑 동갑내기인 스웨덴 출신인 이 냥반은 엄청난 好酒家에 好色漢이기도 했는데, 최근에 사람이 좀 되어간다..라는 소문을 듣고 있었다. 쑥과 마늘을 먹으며 햇볕없는 동굴에서 기거하는 것도 아닐텐데, 사람이 되어가는 것은 또 뭐여..
사우나 비슷한 대중목욕탕에서 비늘만 털어낸 후 약속한 호텔 커피숍에 갔더니, 아직 사람이라 부르기엔 약간 진화가 부족한 모습을 한 그가 창가에 앉았다 반갑게 불렀다.
- 올만이군,
- 그럿쿤,
- 나 좀 도와줄래?
- 글쎄..
건너편 자리에 엄마로 보이는 여자에게 매달리듯 앉아, 진화 덜 된 그를 신기한 듯 빤히 쳐다보고 있던 꼬마 사내아이를 향해 갑자기 그가 히잇~! 하고 장난스레 웃자, 까무러치게 놀란 애가 울먹이려 했다.
짓궂은 넘.. 애를 울리다니..
애들 눈엔 원숭이가 사람말을 하면 신기할테지...
갑자기 오래 전의 일이 생각난다. 서울에 사는 사촌 처제의 결혼식 참석차 식솔을 이끌고 새마을호 기차를 탔을 때다. 그 때 여섯이나 일곱 살쯤 되었을 큰 딸넘이 한 곳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는데, 그 녀석이 보고 있는 건 두 명의 미국인 몰몬교 전도사였다.
딸넘은 혼자서 입을 오물거리더니,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뭐라 말을 걸었고, 놀랍게도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서로 제법 오래 대화를 주고 받았을까.. 눈이 똥그래진 우리 식구들의 자리로 돌아 온 이 넘에게 뭔 일이냐고 묻자 자랑스럽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 아저씨들이랑 인사했어요.
- 넌 영어를 못하잖어.
- 영어 할 수 있어요!
- 뭐라 그랬는데?
- 한뇽 하쎄요우, 져는 뭐슈키라고 함메다~
이게 뭐냐.. 방송에서 영어 흉내낼 때 쓰는 그 코맹맹이 한국어를 영어라고 생각했던 꼬마의 당당한 도전이었던 게다.
눈물이 나도록 크게 웃으니, 애가 자존심이 상했는지 울먹이기 시작했다. 마눌님이 내 옆구리에 이단옆차기를 날리면서 까치 뱃때지 뒤집 듯 눈을 하얗게 뒤집은 후, 얼라를 달랬다.
- 아냐, 아냐, 잘했어. 정말 잘했어. 근데, 아저씨들이 니 영어를 알아 들었어?
울먹이면서 애가 고개를 끄덕였는데, 이 모양을 재미있다는 듯 보고 있던 그들 중의 하나가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 안뇽하쎄요우, 쵸음 뱁겼쑴미다.
엥, 이게 뭐야.. 이넘이 울 딸과 같은 말을 쓰는 게 아닌가.
마저, 마저, 이 넘들이 한국말을 곧잘 하지. 그러니 둘이서 그 코막힌 한국말을 주고 받았으니, 딸넘이 외국인과 나눴던 대화가 영어인 것으로 확신을 할 수밖에..
그 생각이 나서 잠시 웃었다.
Stig와 헤어져 다시 부산행 페리부두로 달렸는데, 전날과는 달리 날씨가 기가 막히게 좋았다. 해안도로를 구불구불 달리는데, 바다는 거울처럼 잔잔하다. 공기가 하도 맑고 깨끗하길래 작은 해송이 바다에 드리워진 길가에 차를 세우고 심호흡을 팍 팍 했다.
거제도의 바닷가길은 몇 번 국도, 몇 번 지방도 대신 몇번 국로, 몇 번 지방로로 부르는 게 더 어울릴 듯 하다.도(道)와 로(路)를 어떻게 구분하는지 아는 바는 없지만, 道라 하면 곧고 바른, 그리고 넓고 큰 길을 가리키는 듯하고, 路라 하면 좌변에 있 듯 발 足으로 가는 좁고 구부러지고 작은 길이 연상된다.말하자면 河와 江의 구분처럼 말이다.중국에 西에서 東으로 흐르는 두 개의 큰 강인 황하와 양자강을 말할 때, 둘 다 큰 강이요 똑 같이 東流하지만, 하나는 "河"라 하고 다른 하나는 "江"이라 달리 부르는데 어원으로 그 까닭을 따져 놓은 것을 읽은 기억이 있다."河"와 "江"를 破字하면, 물 수(水)변에 붙은 가(可)와 공(工)의 차이인데, 가(可)에는 굽는다, 꾸부러진다는 뜻이 있어 하(何)는 사람이 짐을 지고 허리를 굽힌 형상이요, 가(柯)는 굽은 나뭇가지며 가(歌)는 굴곡이 있는 목소리, 기(奇)는 반듯하지 못하고 굽어 있어 비정상적 상태를, 아(阿)는 완만한 언덕을 말하드키, 이 말의 쓰임과 의미를 알 수 있다 했다.이에 반해 공(工)은 곧고 반듯하다는 뜻인지라 항(項)은 반듯하게 곧은 목을, 공(貢)은 백성이 군주에게 곧 바로 바치는 것을, 공(攻)은 똑 바로 쳐들어 간다는 뜻으로 이 역시 쉽게 의미가 와닿는다.물길이 이러할진데, 또한 땅의 길인들 달리 이름짓지 않을 까닭이 있을까.
거제도의 길이야 말로 해안선을 따라, 큰 나무를 피해, 심지어는 밭두렁 허리를 자르지 않으려 구부러지고 꺾어지고 휘어지다 잠시 허리를 편 후 다시 낭창하게 몸을 뒤채는 河의 형상이라, 좌우로 기우뚱거리며 즐기면서 거닐기 딱 좋은 차들의 산책로 아닌가..차를 다시 움직이려다 눈앞에 어른대는 보랏빛 미인이 있어 자세히 보니 엉겅퀴 한 송이가 바다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엉겅퀴 안녕!
뱃머리에 닿으니 아직 배가 올 시간이 한 시간 남짓 남았다.한적한 어촌의 수퍼마켓은 생필품을 팔기도 하거니와 배를 기다리는 여객들을 위해 찻집이 되기도 하고, 식당이기도 했다. 벽에 걸린 메뉴를 보니, 조악한 글씨로 <특미 촌국수>라 적혀있다. 특미.. 별미와는 어떻게 다를까... 청했더니, 10여분 뒤에 할머니가 큰 대접에다 아빠소가 먹어도 될만큼 국수를 잔뜩 담아 내어 오신다.- 삶다 보니 좀 많았는데, 고마 다 잡수이소..이걸... 다 먹으라고요? 간이 덜컹 내려 앉았지만, 무심결에 허리끈을 조금 늦췄다. 특미.. 특미라 하지 않았나. 먹자!(이리 되면 갈 데까지 가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