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한 권의 책 (산사에서 부친 편지)
명정스님이 자신의 스승인 경봉스님의 입적 후
유품 가운데 스승이 주고 받았던 편지를 골라 책으로 묶었다.
고승들의 우렁우렁한 울림이 담긴 260여 통의 서찰을 추려 옮기고
의미심장하고 단정한 사진들을 넉넉히 채워
활자들조차 암자 오르는 길에 만난 자생초들처럼 자유롭다.
엊그제 밤늦은 술자리에 불려 나온 후배 이산하 시인이 건내어 준 책이다.
산사에서 부친 편지 라는 제목과.
낙엽이 지면 내 마음도 흔들립니다 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수행하는 고승들도 떨어지는 잎사귀 하나에 흔들리는가... 그렇다.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하고 싶음이 낙엽귀근(落葉歸根)을 어찌 무심히 느끼랴... 그래서 유정체(有情體) 아닌가...
......
돌아보면나에게 남는 것은
방 안에 걸어둔 붓 한 자루와 낡은 서책 몇 권,
그리고 내 몸을 근질근질하게 하는 쥐벼룩 몇 마리가 전부일 뿐,
한평생 살아온 삶의 무게가 오직 그것뿐입니다
.........
- 한암 스님이 경봉 스님에게(부분) -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한암 스님의 무소유가 香이 짙다.
가능하면 쥐벼룩도 버리고 싶다만..
산문(山門)에 앉아
두고 온 속세의 안부를 읽는다.
나는 그대와의 연을 버리고 왔으나
그대는 나와의 연을 버리지 못하고 이리 소식을 주니
잠시 만사를 잊고 그대, 속세의 안부를 읽는다.
내 어머님은 안녕하시던가..
한 번 화두를 들면 엉덩이살이 짓물러질 때까지 물러서지 않는다 하여 절구통수좌란 별명으로 유명한 판사 출신의 효봉 스님의 편지도 보인다.
일제 때 한 죄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후 인간적 갈등으로 출가를 한 냥반,
그의 열반송이기도 한 吾說一切法... 으로 시작되는 시도 이 편지에서 보인다.
'달마는 왜 서쪽에서 왔는가'
이 선가(禪家)의 암호같은 화두를 앞에 놓고 서래각에 앉아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는 왜 출가를 해야만 했는가를 생각합니다.
내가 아무리 법관이라고는 하나
과연 한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가?
과연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수 있는가?
이미 내 몸이 세속의 70에 들었으나
아직도 이 뼈아픈 화두 앞에서 끝내 결론을 내리지 못합니다.
내가 말한 모든 법
그거 다 군더더기
오늘 길을 묻는가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
지금 생각하면 나의 출가는 내 뜻이 아니라 부처님의 뜻이었는지 모릅니다.
산복숭아꽃이 붉디붉은 이 계절에 스님은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몸은 건강하신지 궁금합니다.
생사가 모두 부처님의 뜻일진대 아직도 무(無)자 화두 속에 파뭍혀 살아 가십니까?
바라옵건데 그 무의 경지를 저에게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 효봉 스님이 경봉 스님에게 -
무(無)란 없는 것이 아니라 비워져 있는 것.
비워져 있음은 곧 채울 수 있음을 말하는 것.
늘 비워둠으로써 얻어지는 마음의 공복.
한 번 화두를 꺼내면 접을 수 없는 그대에게
어찌 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직도 생과 사의 화두 속에 파뭍혀 있는가.
이젠 벗어나 시냇물에 발이나 담가보게.
- 경봉 스님이 효봉 스님에게 -
없는 것이 아니라 비워져 있는 것이 無라..
위 목탁사진의 아래 조그맣게 적힌 글귀가 같이 고개를 끄덕인다.
...무엇이 너의 송장을 끌고 여기까지 오게 했는가.
이런 편지도 있다.
마음이 저리도록 아프고, 그러나 시리게 맑다.
속세의 정을 털고 출가한 지 벌써 3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깨달음에 닿지 못한 이 몸은
이 생각 저 생각에 마음이 산란(散亂)합니다.
마음의 고요를 얻지 못한 까닭인지도 모릅니다.
공부를 하려고 앉아 있으면 혼침(混寢)에 빠져 늘 집중하지 못하고
때론 속세의 사람들이 그리워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아직 내 마음의 경계조차 세우지 못하는
이 못난 비구니를 스님은 용서하시는지요.
여인이 여인의 길을 거부하고 출가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길인가를
스님은 제게 가르쳐주셨지만 이제야 그것을 깨닫고 맙니다.
중에겐 속세의 그리움이란 있을 수 없으며
사람의 연은 더더구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연을 거역할 수 없는 깊은 혼침에 잠들고 맙니다.
가히 부처님께 억겁의 죄를 짓는 것 같아
이렇게 편지를 띄우고 산을 내려갑니다.
다시는 이 산을 오지 말라 하시면
정말로 다시는 오지않을 각오로 산길을 내려가지만
가을산 쌓인 낙엽이 자꾸만 발목에 채입니다.
- 모 비구니 스님이 경허 스님에게 -
가을에 곁에 두고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